2년의 세계여행/아메리카

피츠로이에서 생과 사를 넘을뻔하다. 눈보라 만난 이야기_Fitz roy

페드로jr 2020. 3. 10. 11:48
성난 피츠로이_동영상 캡쳐

 
 엘 칼라파테 el calafate 에서 버스를 타고 엘 찰텐 el chaltén 에 도착했을때, 이미 마을 전체에 어둠이 깔려있었다. 전세계 트레커들이 죽기전에 꼭 한번 오고 싶다는 파타고니아 그 중 피츠로이의 베이스캠프인 이곳은 고요함을 넘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몇일간 꽤 내린듯, 길 옆 인도와 화단에는 도로에서 치워진 눈이 발목만큼 쌓여있었다. 비수기라 많은 곳이 닫혀 있었다. 운좋게 적당한 가격에 좋은 숙소에 묵을 수 었다. 알고 보니 성수기때는 한달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비수기가 좋을때도 있네'


  파티가 한창이다. 이틀간 내린 눈이 산을 덮었고, 내일도 눈이 올거라고 했다. 이미 우수아이아에서 출발하는 티켓을 구매했기에, 주어진 한달 안에 파타고니아의 많은 곳을 다녀보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시락을 만들어놓고 잠이 들었다. 눈이 오면 아침으로 먹으면 되지 않는가.

 새벽 5시. 밖을 보니 여전히 눈이 온다. 포기하고 다시 잠이 든다. 한시간쯤 잠들었을까? 다시 나가보니 금새 눈이 그쳤다. 곧바로 가방을 들쳐메고 피츠로이 Fitz roy 로 향한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새벽 어스름을 헤치며 첫눈을 밟을때 나는 '뽀드득' 소리. 마치 새하얀 정글을 정복하는 느낌이다. 

도입부 호수

 

저때만해도 저기에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나무에 켜켜이 쌓인 눈이 수제비 떼듯 조금씩 떨어진다. 구름한점 없는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에 녹으면서 영롱한 빛을 낸다. 사랑하는 여우가 호랑이에게 시집을 가던 날, 햇님 뒤에 숨어 우는 구름이 그랬듯,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발목까지 오던 눈은 중턱을 넘어 피츠로이가 보일 때쯤 무릎까지 쌓였다. 다행이 중턱부터는 오전일찍 다녀간 이가 있어 발자국을 따라갔다. 발자국이 없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하리 만큼 눈이 쌓였기 때문에..

 

설산에서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눈 밑에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약간의 경사에도 미끄러 지게 될것이고 결국 낭떨어지까지 도달하게 된다. 산은 때론 마음을 씻어주는 치유의 공간이지만 목숨을 앗아가는 강탈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엘찰텐

 

무릎까지

 피츠로이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장소로 올라가려 하는데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그런 눈보라를 만났다. 게다가 산에는 아무도 없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어쩔수 없이 발길을 돌린다.

'저 위에서 먹으려고 도시락 싸왔는데..'

 뒤를 돌아보니 무릎까지 들어가던 발자국이 두번의 눈보라에 신발만큼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눈보라가 발자국을 모두 집어 삼키기 전에 어서 빨리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도 죽을 수 있겠구나'

 영화 '히말라야'가 생각났다. 그곳의 눈사태 정도는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 만나보는 눈폭풍에, 이 광활한 산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극한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생을 향한 인간의 집착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삶의 어느지점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발자국을 따라 내려갔다. 혹시나 하는 공포심에 발을 헛디딘다면, 아득히 저 밑에서 수개월 후 눈이 녹아서야 발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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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보라가 멈춘 피츠로이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강렬한 태양이 산 중턱 어설피 쌓인 눈을 녹여버렸다. 마른 나무에 앉아, 피츠로이를 보며 먹으려 했던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긴장이 풀리니 헛웃음이 난다. 정말 생과 사는 한끗 차이임을 실감했다.

매일이 소고기 파티

 산을 탄다는 것은 인생과 닮았다. 산은 인간이 발을 디디기 전부터 혹독했다. 눈이 쌓이면 눈보라도 치고, 겨울이 오면 혹한의 시간을 견딘다. 인간만이 '하필 내가 왔을때 날씨가 이러냐' 고 역정을 낸다.


나도 그러지 않았을까? 상대에게 바랬던것 말이다. 원래 그런 사람인데, 너는 왜 그러냐며 정중한척 비난한건 아니었을까? 관계에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 너는 왜이리 마음을 여는 것이 늦냐며 보채고, 너는 왜 그리 소극적이냐며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던가?

 

원래 그들은 그래왔는데, 산은 원래 그래왔는데, 이래라 저래라 했던건 아닐까, 바꿀 수 없는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것은 아닐까, 그래서 상대를 어렵게 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츠로이에서 눈보라와 인간사라... 참 뜬금없다.

아마 저곳은 지옥일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