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팔가르 전투
세계 3대 해전 트라팔가르 전투
트라팔가르 해전은 프랑스와 영국이 스페인 영토인 트라팔가르에서 충돌한 해전으로, 우리에게는 세계 3대 해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세계 3대 해전은 에게해 패권을 두고 충돌한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충돌한 살라미스, 새로운 강자 영국에게 스페인 무적함대가 대패한 칼레, 그리고 이 트라팔가르 해전을 뜻한다.
우선 이 전투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프랑스의 육군 병력을 영국에 실어 나르기만 하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물론 프랑스의 해군은 영국에 비해 열세였지만, 어떻게든 지상군만 상륙시킨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나폴레옹이다.
마렝고를 타고 있는 나폴레옹
전투의 배경
세계 3대 해전에 꼽힐 정도로 치열했던 이 전투는 스페인 서부의 트라팔가르라는 이름의 곶에서 발생했다.
참고로 곶은 바다를 향해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뜻한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영국은 대서양의 제해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힘의 균형을 깨트리기 위해서라도 프랑스는 영국을 공격하고자 했다. 워낙 영국 해군이 막강하여 바다로 넘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뿐이지, 나폴레옹은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막강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35만 대군을 실어나를 계획을 준비한다. 1805년 10월 21일,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영국 해군과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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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질문! 그런데 스페인은 왜 참전했을까?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 제 1제국에 속한, 연합이라고는 하지만 프랑스를 거부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때문에 전투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다.
제 1 프랑스 제국 영향권
영국의 대승
영국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영국군은 2열 종대로 연합군 적진으로 돌진하며 진영을 각개격파하기 시작했다. 결국 해군의 우위를 바탕으로 영국군이 우위를 선점했다. 반면 연합군은 낮은 숙련도와 의사소통 문제로 진영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해군에서 열세인 연합군은 선상 백병전을 계획하고 갑판에 수류탄을 던지거나 망루에서 소총을 쏘는 방식이었는데, 영국 해군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갑판이나 선채에 병력을 줄였다. 반면 백병전을 준비하던 연합군은 뒤이어 오는 영국해군에 의해 격파당한다.
결국 연합 함대는 격침 1척, 포획 파괴 21척, 전사 3,200명, 그만큼의 부상자, 포로도 약 8,000명 이나 발생했고, 빌뇌브 제독 또한 생포됐다. 영국 측은 상실함 0, 전사 400명, 부상 1,200명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로 끝난다.
프랑스의 유일한 업적은 넬슨 제독을 저격했다는 박한 평가가 나올 정도 였다.
영국 넬슨 제독
패배는 예상되었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영국 해군을 분산시켜 지상군을 투입한다는 전략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수가 발생한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지휘관인 트레빌 제독이 사망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 해군에서 해전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번 전투의 지휘관이자 영국 해군 제독인 넬슨을 막은 경험도 있었다. 그의 후임으로 빌뇌르가 선택된다.
군대는 영국 해군이 보다 해전에 특화되어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막강했지만 육군 중심의 군대였다.
또한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군은 수적으로는 우위였으나 스페인 해군과 섞여 지휘 계통이 복잡하고, 사기나 숙련도가 낮았다.
왜냐하면 이건 스페인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 해군은 사기도 숙련도도 높았고, 지휘체계 등 모든 면에서 우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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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마친 제독의 삶
포로로 잡힌 빌뢰브 제독은 오래 지나지 않아 석방된다. 패배의 자책감 때문인지 프랑스로 돌아온 뒤 자살한다.
식사용 나이프로 했던 자살이기 때문에 타살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주장으로는, 과거 식사용 나이프는 과일을 깍아 먹을 정도로 날카로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은 정황이다.
빌뇌브 제독
전쟁이 일으킨 나비효과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의 기세가 꺽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유럽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트라팔가르 전투 이후 영국에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하지만 영국 제품은 보란듯이 다른 국가에서 인기를 이어갔다. 프랑스는 영국 대륙 봉쇄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포르투갈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프랑스 군대를 스페인에 상주시킨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 특성 상, 프랑스와 스페인은 사이가 좋은적이 없었다. 게다가 스페인을 전투에 이용한 프랑스를 국민들이 반길리가 없었다.
그런데 일부 국민들은 이들을 환영했다. 프랑스에서 퍼지고 있는 시민 혁명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스페인은 카를로스 4세와 부인 그리고 고도이의 전횡이 심각했고, 국민들은 왕권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옷 벗은 마하'로 유명한 화가 고야 또한, 프랑스 주둔에 동의했다가 대중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 역시 프랑스 혁명이 스페인에서도 이뤄지길 바랬던 것이다.
프랑스가 포르투갈로 진격하자 포르투갈 정부는 부리나케 브라질로 피신한다. 승리를 거둔 프랑스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드리드로 진격했고, 스페인의 저항이 시작됐다.
이것이 반도전쟁 또는 독립전쟁이라고 한다. 이때의 참상을 고야가 ‘1808년 5월 3일’이란 작품으로 발표한다.
1808년 5월 3일_고야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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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전투와 판박이
1805년에 발생한 트라팔가르 해전은 1588년에 발발한 칼레 해전과 판박이다.
프랑스와 연합이지만 또 다시 영국과 치뤄진 전투였고, 출정 전 사령관의 죽음, 지상군을 상륙시키기 위한 작전부터 영국에 패배한 것까지 매우 흡사하다.
바다 건너 식민지에 미친 나비효과
전쟁의 과실은 승리자가 모두 갖는다고 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영국에게 이익이 되었다는 것은 꽤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건재했다.
오직 스페인에만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페인의 상황은 , 중남미 식민지 국민들에게 우리도 그들처럼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건넸다.
결국 아메리카 식민 국가들은 연쇄적으로 독립에 성공했고, 스페인의 국력은 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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